프랑수와François 1세(b1492.9.12. / r1515 – d1547.3.31.)

   프랑수와1세는 정치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와 갈등을 겪는 동안 위그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종교적인 문제까지 휩싸였다. 본래 프랑수와1세는 그의 누나 마르그리뜨 덩굴렘과 함께 인문주의를 상당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 뿐 아니라, 때마침 프랑스에 불어 닥친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다양한 부패로 찌든 가톨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이 결합하여 기욤 브리소네와 르페브르가 시작한 “모 서클”(Cénacle de Meaux)이라고 불리는 개혁 모임을 낳았다(1521-1525). 모는 파리에서 동쪽으로 60km 남짓 떨어진 도시이다.

   프랑수와1세는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지원을 받으면서 점차 자리를 확립하는 신교 사상 때문에 고민이 더해갔다. 1523년부터 신교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1534년 10월 17일(토)과 18일(주일) 사이의 밤에 이른 바 벽보(Placards) 사건이 터졌다. 성모숭배, 미사, 화체설, 교황제도 등을 비판하는 벽보가 프랑수와1세의 침실에까지 붙여진 것이다. 프랑수와1세는 이 벽보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하여 신교를 박해하기로 결심하였다. 1536년 깔뱅은 바젤에서 기독교강요 초판에 프랑수와1세에게 신교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신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기를 청원하는 헌정사를 썼다.

   프랑수와1세의 박해 아래 위그노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모Meaux의 에띠엔느 멍정의 집에서 최초의 신교 교회가 설립되었다. 삐에르 르끌레르끄가 최초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책임을 진 목사”로 임직되었다. 모 교회는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인 난민 교회를 모범으로 삼아, 개혁파 신학을 따라 성경을 읽고, 형식을 갖추어 기도하고, 영혼을 울리는 시편찬송을 불렀다. 당시 예배를 드리던 62명의 신자들이 체포를 당했고, 그 가운데 14명은 공개적으로 화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