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왈도 Pierre Waldo

피터 왈도 (1140년 경 ~ 1184년 경)

(독일 Worms 루터 광장의 왈도 기념상, 조병수 촬영)

  1170년 리용의 부요한 상인이었던 피터(Pierre/Peter) 왈도(Vaudo/Valdo)는 4세기의 성인 알렉시우스(Alexius)의 전설에 관한 방랑시인의 노래를 들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고, 민중어로 접근한 복음에 영향을 받아 청빈 사상으로 돌아섰다. 부유한 로마 귀족의 아들인 알렉시우스는 결혼식 전날 밤 외형적인 인생에 회의를 품고 신부에게 동정녀로 살 것을 권유하고 소아시아로 떠났다가, 말년에 아무도 볼라볼 정도로 병약한 몰골로 부모의 집에 돌아와서 거지로 몇 해 동안 오두막에 살다 죽었다.

  하지만 이런 전설보다는 왈도가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 고민하던 중에 복음서 가운데 부자 청년 이야기(마 19:21-23)를 듣고는 크게 영향을 받아 회심한 것으로 보인다. 왈도는 자신의 재산의 일부를 부인에게 남기고 나머지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 뒤에 이상적인 청빈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사제들에게 민중어로 복음서를 번역하게 하고, 자신이 암기한 후 다른 사람에게 전도했다. 많은 남녀가 이 사상에 동의하여 왈도파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사도적 방랑설교를 통한 회개 운동이었다.

  이때 대주교가 개입하여 활동을 중단시켰기 때문에, 왈도는 교황 알렉산더(Alexander) 3세에게 항소를 하였다. 감찰관들에게서 왈도파의 구성원들이 주로 무학자들이라고 보고 받은 교황은 지역 주교의 동의 아래 왈도파 사람들에게 설교를 허락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왈도파는 그 조건을 거부하였다(1180년 왈도파 언약). 왈도파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핍박을 당하다가 베로나(Verona) 공의회에서 교황 루치우스(Lucius) 3세에게 출교를 당했다. 이후 왈도파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다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깔뱅의 신학을 따르는 개혁파 교회(Reformed churches)에 결합되었다.

[조병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