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베자 Theodor Beza

테오도르 베자Theodor Beza(1519-1605년)

테오도르 베자는 깔뱅의 후계자가 되었다. 베자는 깔뱅의 뛰어난 제자이자 동료였는데,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17세기를 산 사람이다. 이것은 베자가 종교개혁과 정통주의를 연결하는 결정적인 교각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 유년시절

베자는 1519년 6월 24일 부유한 지방행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자는 아홉 살 되던 해인 1528년에 깔뱅의 은사이기도 한 멜키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라는 유명한 헬라어 학자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개신교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539년 베자는 파리로 가서 그의 삼촌과 함께 법률가로 활동하면서 소원대로 문학을 공부했고 최고의 파리 사회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544년 베자는 두 친구 앞에서 평범한 사람의 딸인 끌로디느 드노쎄Claudine Denosse와 비밀리에 결혼을 했다. 1548년 베자는 유명한 라틴어 시집을 발표하는 등, 앞길이 창창한 사람이었지만, 갑자기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때 베자는 여러 가지 일로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서 개신교 신앙을 찾아 깔뱅이 활동하는 제네바로 갔다.

  1. 로잔 활동

베자는 로잔을 통과할 때 환영해주었던 삐에르 비레Pierre Viret의 설득을 받아 로잔 아카데미의 그리스어 교수로 취임했다(1549년 11월 6일). 베자는 공개강의에서 로마서와 베드로서신들을 가르침으로써 열정과 성경학식을 증명하였다. 베자는 로잔에 머물고 있는 동안 베자는 전염병에 감염되었다. 그때 깔뱅은 파렐Farel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베자를 주목하였다(1551년 6월 15일). 1557년 봄에 인근에 있는 왈도파 사람들이 핍박을 받게 되자 베자와 Farel은 스위스 전역을 돌면서 도움을 요청했고 독일의 개신교 군주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1. 제네바 활동

1558년에 베자는 깔뱅의 제안을 따라 제네바에 그리스어 교수로 청빙되었다. 1559년 6월에 제네바 아카데미가 개원되었을 때 베자는 학장으로 취임했다. 40세의 나이에 최종적인 정착지와 사업에 들어선 것이다. 동시에 그는 제네바에서 목회하게 되었다.

  1. 쁘와시Poissy의 회담

프랑스의 태후인 까뜨린느Catherine는 로마 카톨릭 성직자들과 개신교 목회자들의 토론을 결정했다. 베자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토론을 위해 파리로 갔다. 1561년 8월 23일에 열린 첫 번째 회담의 주제는 화체설이었다. 두 번째 회담은 1561년 9월 9일에 쁘와씨에 있는 수녀원에서 개최되었다. 베자는 카톨릭의 유리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논쟁에 참여하여 용감하게 하늘이 땅에서 먼 것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성찬의 떡에서 멀다고 논증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1. 위그노 지도자들의 자문

1562년 1월 17일에 “일월 칙령”(Edict of January)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위그노들이 낮에 성 밖에서 예배를 위한 집회를 가지는 것을 허락하는 칙령이었다. 그러나 이 칙령에도 불구하고 3월 1일 Guise의 공작은 무방비상태의 위그노 수백 명이 바씨Vassy에 있는 헛간에서 평화스럽게 예배를 드리는 동안 무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베자는 카톨릭 교도들이 “일월 칙령”을 범한 것을 강하게 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념비적인 말을 덧붙였다. “꼭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은 수없이 망치를 닳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모루라는 사실입니다.”

  1. 깔뱅의 후계자

베자는 깔뱅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때 깔뱅은 이미 사망의 그늘에 덮여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쯔빙글리와 불링거의 관계를 닮았는데, 교회에 매우 큰 유익을 주었다. 1564년 깔뱅의 사후에 베자는 즉시 그에 관한 고전적인 전기(“깔뱅의 생애” Vita Calvini)를 기술했다(1565년). 제네바 시의회는 베자를 깔뱅의 후계자로 선출했다. 베자는 이 임무를 1580년에 은퇴할 때까지 완수했다.

베자는 시와 교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했고 학생들에게 설교와 강의를 했다. 그는 프랑스로부터 오는 피난민들과 다른 나라들로부터 오는 방문객을 맞이했다. 특히 1572년 8월 24일 주일, 곧 바돌로매의 날(Bartholomew’s Day)에 수많은 위그노들이 파리에서 학살을 당했고 그로부터 며칠 동안 프랑스 여러 곳에서 똑같이 충격적인 일이 반복되었다. [위그노에 대한 핍박은 프랑스 국왕 앙리Henry 4세가 1598년 “소위 개혁파 종교”에 관용을 표명하는 낭트Nantes 칙령을 발령하기까지 계속되었다. 낭트 칙령은 위그노의 정착과 예배와 직업에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572년 9월 1일에 상처를 입은 피난민들이 처음으로 제네바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하루 동안 금식과 기도 후에 베자는 스위스 시민들에게 담대할 것을 권면하면서 고난당한 형제들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 외에도 그는 매일같이 밀려오는 수많은 사무에 조언과 견해를 제출했다. 그는 엄청난 서신왕래를 감당했다. 때때로 논쟁에 참여하고 이단들을 축출했다.

베자는 성경학자였다. 베자와 관련하여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베자 사본(Codex Bezae Cantabrigiensis, D사본)이다. 이것은 4세기 말 5세기 초의 사본으로 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담고 있다 (아마도 원래는 공동서신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베자는 이 사본을 1562년에 리용에 있는 이레내우스St. Irenaeus 수도원 도서관에서 입수했다. 베자는 이 사본을 1581년에 캠브리지 대학에 헌정했다. 베자 자신은 헬라어 신약성경을 발행했는데(1565년), 이것은 영국의 제임스James1세의 시대에 영어성경의 대본이 되었다.

  1. 베자의 말년

베자는 1586년에는 매일 설교하던 일을 그만두었고, 그 후 1600년까지 오직 주일에만 설교를 했다. 1598년 베자는 아카데미에서 은퇴를 했고 자신의 도서관을 처분했다. 1600년에는 아카데미에서 마지막으로 공직을 수행했고 마지막 설교를 했다. 그렇게 하여 베자는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17세기에 설교한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16세기 종교개혁자가 행한 유일한 17세기 설교였다. 베자는 1605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제네바에 있는 삐에르 교회에 안장되었다.

[조병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