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 깔뱅 Jean Calvin

 쟝 깔뱅 Jean Calvin(1509-1564년)  

깔뱅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1) 전반기(1509-1541년)  

깔뱅은 1509년 7월 10일 Noyon에서 출생했다. 1523년 그는 파리로 가서(14세) 현대교육의 창시자인 M.Cordis의 지도를 받았고 몽테규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어거스틴과 교부를 연구했다. 1529년 4월 3일에는 문학석사를 받고 오를레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라틴어 실력을 쌓고 히브리어 공부를 공부했다. 1532년 4월 4일 세네카Seneca의 “관용에 관하여”(De clementia)를 주석해서 출판했다.   1533년 가을 그의 친구 니꼴라스 꼽Nicolas Cop이 루터의 설교를 인용하여 이신칭의를 설교한 것이 화근이 되어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1536년 3월에 기독교강요 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 초판을 출판했다(27세).   그해 가을 파렐Farel(1489-1565)이 제네바에서 깔뱅을 개혁에 동반시켜 제1차 제네바 활동이 시작되었다(1536-38년).   그러나 1538년 4월 23일 깔뱅과 파렐은 엄격한 교회권징과 생활질서를 요구함으로써 제네바에서 추방을 당했다. 파렐은 뇌샤텔Neuchatel에 머물고, 깔뱅은 스트라스부르의 부써Bucer의 요구를 따라 그와 함께 머물렀다. 이때 위그노 교회를 목회하면서 처음으로 시편찬송을 접하였다. 이때 마로Marot의 도움으로 첫 시편찬송을 출판하였다. 1539년 2월 깔뱅과 멜란히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나 교회연합 문제를 놓고 카톨릭 지도자들과 논쟁을 했다. 1539년 가을 제네바인들을 카톨릭교회로 돌아오게 하려는 사돌레Sadolet 추기경에게 “참 교회는니라 복음이 본래의 정결함을 지닌 채 설교되는 교회”라고 답변서를보냈다.  1540년 8월 깔뱅은 회심한 재세례파 미망인인 이들레뜨 드 뷔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하였다. 

2) 후반기(1541-1564년)  

깔뱅은 1541년 9월 그의 지지파가 우세를 차지하여 제네바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제네바는 칼빈의 종교개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해 11월에 제네바 교회의 조직Ordonnances ecclesiastiques을 세웠다.   1542년에는 대화식으로 된 제네바 신앙교육서를 작성했다.  1544년에는 종교개혁에 동의하나 카톨릭에 남아 이중생활하는 “니고데모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1549년 제네바와 취리히의 개혁파 연합을 위해서 깔뱅과 불링거가 취리히 협약(Consensus Tigurinus)을 맺어 성찬 사상에 일치를 보았다.  1550년 위그노 출판업자 로베르 에띤느가 파리에서 피신 와서 깔뱅의 저술들과 개혁파 서적들을 출판하였다(Rue de Robert Estienne). 그 외에도 많은 프랑스 위그노들이 제네바에 와서 정착하면서 교회를 세웠다(대표적으로 Temple de la Fusterie). 1553년 깔뱅은 삼위일체론을 반대하고 원죄를 부정하는 스페인 학자 세르베투스Servetus와 논쟁했다. 그는 신적 로고스가 인간 예수님에게 성육신하였다고 믿었다. 그래서 로고스는 영원하지만, 성자는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원하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구교와 신교에 의해 정죄를 받았다. 그는 제네바 시민이 아니었으므로 입국하지 않도록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으나 결국 입국하여 체포되었고, 제네바 시의회의 결정에 따라 1553년 10월 27일 화형을 당했다.

  1555년부터 제네바는 신의 도시로 부상되어 유럽의 종교개혁을 이끌어갔다(불란서, 영국, 스코드랜드, 폴란드, 헝가리 등). 1559년깔뱅은 기독교강요 최종판을 출판했다. 1559년 6월 5일 깔뱅은 제네바 아카데미Academia Genevensis를 설립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낙스John Knox가 1556년에서 1559년에서 설교하던 강당(소위 “깔뱅 강당”Auditoire de Calvin, Calvin’s Oratory)에 설립되었다. 이 강당은 13세기에 고딕 형식으로 건축된 단순하지만 우아한 건물이다. 여기에서 낙스는 설교를 했고, 깔뱅은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신교 피난민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격려하였다. 그들은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화란어 등으로 예배를 드렸다. 지금도 스코트랜드 장로교회, 화란 개혁교회, 이탈리아 왈도파 교회가 예배를 드리며, 교회 안 벽면에깔뱅과 종교개혁에 관한 정보가 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두 가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7학년제의 초등교육과정(schola privata)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학교육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과정(schola publica)이었다.

깔뱅은 성경의 사람이었다. 제네바에서 깔뱅이 받은 첫째 명칭은 “성경 낭독자”였고(CR 5, 233), 자신을 가리켜 “제네바 교회의 하나님 말씀 목회자”라고 불렀다. 그는 성경만이 하나님과 인간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유일한 원천(fons)이며 교사(dux)라고 믿었기 때문에 전 생애를 드려서 성경을 주석했다. 그는 1540년 로마서 주석(라틴어)을 필두로 1564년 여호수아 주석(불어)까지 출판했다. 깔뱅은 1564년 5월 27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조병수 글]